1961년 5월 29일 아침, 모닝 커피 한잔하러 다방에 들른 사람들은 황당한 상황에 빠졌다. 서울 시내 1150곳 다방에서 커피가 일제히 자취를 감춘 것이다. 출입문엔 "협회 지시에 의하여 오늘부터 커피를 팔지 않겠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었다. 치안국장은 "다방협회 관계자들이 커피를 팔지 않겠다고 자진 제의했다"고 밝혔지만 이 말을 곧이 들을 사람은 거의 없었다. 5·16 쿠데타를 일으킨 후 사회 각 부문 개혁을 군대식으로 몰아붙이던 군사정권은 양담배와 커피를 외화 낭비와 사치의 주범으로 꼽아 전면판금이라는 초강경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조선일보 1961년 5월 29일자). 커피가 사라진 커피숍엔 애꿎은 생강차와 유자차 냄새가 진동했다. 다방 매출은 된서리를 맞았다. 오직 한 곳, 관영호텔인 반도호텔의 커피숍만이 외국 손님의 편의를 핑계 삼아 커피 판매가 허용된 덕에 개점 이래 최대의 매출 대박을 기록했다.
커피 판금은 돌연한 조치였지만 시민 상당수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4·19 혁명 때부터 개혁 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커피는 늘 도마에 올랐었다. 혁명 직후인 1960년 7월 서울대 문리대생이 중심이 된 '신생활선도대'는 거리를 행진하며 양담배와 커피 추방을 외쳤다. 어떤 학생은 거리의 다방에까지 뛰어들어가 손님에게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이기에 대낮부터 여기 앉아 외국산 커피를 마시고 있느냐"고 일장훈계를 퍼부었다. 사회 일각에서 학생들의 과격한 행동을 우려했지만, 서민층에선 "뜨뜻미지근하게 개혁을 추진해 봤댔자 허영과 사치에 물들어 버린 족속들이 정신차릴 리 만무하니 강력하게 해야 한다"고 지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군사정권의 커피 퇴출은 외화 낭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갈 데 없는 실업자들이 다방에 죽치고 앉아 커피 한 잔 놓고 온갖 잡담을 하고, 천하를 뒤흔들겠다는 공리공론을 늘어놓는 비건설적인' 풍조 자체에 대한 군인의 철퇴였다. 5·16 후 공무원에겐 다방 출입 금지령도 내려졌다. 감투 좀 쓰기 위해 정치인이나 정치 브로커를 만나려고 다방을 찾던 사람의 발길도 뚝 끊어졌다. 커피가 학생 혁명 세력과 군부 세력 모두에게 배척받은 점이 흥미롭다. 몇 년 뒤인 1966년 중국 문화혁명 때 홍위병도 커피를 '부르주아의 사치품'인 동시에 외화의 낭비라고 규탄해 광둥시 다방은 냉수만 팔게 될 것이라고 UPI가 보도했다. 제3공화국 정부는 커피를 몰래 판 다방을 수시로 적발해 수십 곳씩 무더기로 영업 정지시키고, 다방 마담을 구속까지 했다. 한 신문은 5·16 1주년 성과를 점검하면서 '커피가 철두철미 없어진 일'을 꼽았다.
하지만 '신이 내린 음료'를 사회악처럼 배격한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64년 9월 25일, 정부는 커피의 수입 판매를 마침내 허용했다. 1961년 커피와 함께 퇴출됐던 양담배는 1986년까지 25년간 꽁꽁 묶였지만, 커피 금지의 시대는 3년 만에 막을 내렸다. 사치의 공간으로 몰렸던 1960년의 다방은 전국에 2800곳이었는데, 오늘의 커피 전문점은 전국에 4만9600곳이다. 1960년 서울 시민 한 사람은 한 해 커피를 약 25잔꼴로 마셨는데, 2015년의 1인당 커피 소비는 484잔으로 폭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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